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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클리셰를 깨버리는 영화 소리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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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고별 2022. 1. 5.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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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리도 없이 공식 포스터

두 남자의 일상 이야기

영화의 주인공으로 두 남자가 등장한다. 이 둘의 주업은 조직폭력배들에게 시체를 받아 땅에 묻어 처리하는 일이다. 마동석을 닮은 경찰이 이 둘을 쫓아야 할 것 같지만, 영화가 그리는 이 범죄는 이들의 일상이다. 마치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한 후 하루 종일 일하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것처럼, 이 둘도 시체를 받아 처리하고 아침이 돼서야 퇴근한다. 범죄자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악한 미소 하나 없이, 일상을 살고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 중, 두 사람은 클라이언트와 관계 유지를 위해 조금 무리한 요구까지 들어주려다가 유괴범까지 되어버린다. 애쩌다가 맡게 된 이 부잣집 딸을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부모에게 돈을 요구하도록 하는 중개인 말을 듣다가 혼자 겁먹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가 하면 이웃에 사는 인신매매범에게 넘겼다가 후회하고 다시 아이를 찾아온다. 이때까지도 이들(이 시점에 한 명은 계단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스스로 범죄자라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마침내 아이를 학교 선생님에게 데려다주고 나서야 선생님이 외치는 "유괴범이야!" 소리를 듣고 알게 되지 않았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도망치며, 두 남자의 일상이 범죄가 되었을 때 이 영화는 끝이 난다.

 

클리셰가 깨질 때 느끼는 희열

영화 소리도 없이는 전체적인 스토리와 관점부터 일반적인 상업영화로서의 범죄 영화와 다른 길을 간다. 이에 더해서 기존 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클리셰들을 과감하게 그러나 무서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깨부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번째 장면은, 유채명 배우가 맡은 창복이 시장에서 돈가방을 가지고 도망치는 장면이다. 언제나 이런 장면에는 지나가는 행인 속에 숨어 주인공을 주시하고 쫒는 상대편이 있기 마련이다. 창복 역시 겁에 질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다니지만 사실 그곳에 위험은 없었다. 오히려 본인의 어색한 걸음걸이로 인해 계단에서 구르고 머리를 부딪혀 목숨을 잃는다.

두 번째 장면은, 유이인 배우가 연기한 태인과 문승아 배우가 연기한 초희의 관계성이다. 극 중 초회는 작은 몸집과 다르게 굉장히 어른스러운 아이이다. 태인의 집안 사정과 그의 동생을 보며 상황을 파악한 초희는 탈출을 위해 다양하게 머리를 쓰는데 그중 하나는 태인 남매와 친해지는 것이다. 이 셋이 점점 가족처럼 지내는 것을 보고 기존 영화에서 자주 봤던 스톡홀름 신드롬의 모습인가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초희는 자신의 학교에서 선생님을 만난 후 바로 귓속말로 태인이 유괴범임을 알린다. 발단과 과정이 어떠했든 유괴는 유괴였으니.

세 번째 장면은, 잠시 탈출 기회가 생긴 초희가 어두운 논밭을 홀로 달리며 도망치다가 겨우 만난 아저씨의 정체이다. 메리야스만 입고 술에 취한 채 돌아다니고 있는 이 아저씨는 스스로 경찰이라고 하며 초희에게 음흉한 미소를 보내며 같이 가자고 한다. 너무나 수상한 이 아저씨의 정체는 이후 등장하는 부하 경찰에 의해 진짜 경찰임이 드러난다. 그동안 보아온 영화에서 이렇게 이웃 아저씨인 척하는 범죄자 차림을 한 경찰을 본 적이 있던가 싶다.

이외에도 클리셰를 부수는 자잘한 포인트들이 영화 내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때마다 영화에 느끼는 매력에 배가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기분 좋은 희열은 영화를 마지막까지 관람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이 영화의 홍의정 감독은 영화를 통해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인터뷰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도망쳤던 독일 유대계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히만은 실제 나치 독일의 중령으로 수많은 유대인 학살의 실무를 책임진 인물이다.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체포한 후 공개재판을 열었는데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그저 상관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만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는 인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재판을 보고 아렌트는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학살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그 행동이 악한 일일 수가 있음을 역설했다. 이 영화에서 창복과 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본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유괴범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범죄 앞에 "어쩌다 보니" 나 "할 수 없이"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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